'2010/03'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3/22 바운스.... 그리고 걷기...
  2. 2010/03/22 이것이 바로 현실...
  3. 2010/03/12 고민...
  4. 2010/03/02 더 로드... 소설과 영화...
바운스. => 공이 통통 튀는 모습 )

바운스는 다른 소셜댄스와 스윙의 경계선을 가장 명확히 드러내준다.
지 속적으로 음악리듬에 맞춰 상하로 튀는 느낌이 곧 빠른 음악에서도 매우 탄력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원동력이다. 지마의 표현대로 "익살스러운 느낌" 그런 부분이 이 바운스에서 시작되듯 싶다.

사실 바운스를 완전히 이해단계에 있질 못하다. 단지 예전에 알려준대로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며 바운스를 만들라 했고, 그 모습을 흉내냈을뿐이다. 그리고 무릎이 시큰거렸다. 뭐 이유가 간단하게도 잘못된 몸을 썼고 그렇기에 무릎이 심하게 아파온것이다.

보다 원초적으로 접근해보면 걷는 방식의 차이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예전에 BBC였나 디스커버리였나 기억나진 않지만 북유럽과 아프리카 사람들의 걷는 방식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추운 나라에서는 두꺼운 털신발로 눈밭을 걸어 다녔고, 아프리카 사람들은 뜨거운 사막위에 맨발로 걷는다. .
발바닥이 닿는 위치부터 무게중심 움직이는게 다른것은 추운 지역에서는 몸을 적게 움직이며 체력을 비축하고, 더운 지역에서는 바닥의 열기에 발이 손상되지 않게 사뿐거리듯 빠르게 움직인다. 이런 부분이 북유럽과 아프리카사람의 걷는 방식에서 부터 몸의 상태까지 다르게 진화한다.

유전적으로 타고난 바운스라는것. 그리고 흑인들이 만든 춤이라는 점을 본다면 한국에서 스윙을 그들처럼 맛깔나게 한다는건 어려울 수 있다. 더불어 평소에 걷는 방식에서도 흑인들(힙합 그룹같은 경우) 균일하면서 느린 바운스가 살아 있는것이 체질이지 싶기도 하다. 물론 현재는 스윙판에서 화이트호퍼스같은 탄력있는 흑인은 보질 못했다. (이부분은 검은 아빠에서 하얀엄마로 넘어갔다고 이야기 하는 싱싱형 글을 참고...)

다시 앞서 이야기로 돌아와 그럼 바운스는 무엇인가?
그것은 음악에 맞춰 걷는다는것이다.
억지로 기합받는게 아니라 흥이 나게 걷는것이다.
뭔가 음악에 심취해서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듯 한 움직임.


마지막으로 지마의 정리를 토대로 5가지 주안점을 정리해봤다.
1) 무리하지 않게 몸을 움직인다. (걷는느낌으로..)
2) 강제로 무릎을 쓰지 않는다. (무릎보단 발목을 활용해서..)
3) 바운스를 끊어지지 않게 한다. (공이 튀다 멈추지 않듯이..)
4) 음악에 맞춰 신이나는걸 표현한다. (공연에서 방방 뛰듯이 신나게..)
5) 항상 균일한 바운스를 유지한다. (중간에 멈추는 느낌나지 않게..)


바운스가 되어야 찰스턴이 되니 이번주는 바운스 집중 훈련 기간으로...
Posted by loki (archflow@hotmail.com)


조만간 이 동영상도 삭제될듯...

뉴스 링크


만약. 저 구호를 내버려두었다면 어땠을까? 두어시간 외치다 자진 해산 하지 않았을까?
기자들까지 범죄자 취급하며 내쫓는 저 무리들... 당장 위에서 큰소리 떨어질까 벌벌 떠는 모습...
하긴 언론통제로 윗사람에게 불려가 쪼인트 까는 세상으로 돌아왔으니....


Posted by loki (archflow@hotmail.com)
2010/03/12 09:00
즐거워...는 보인다. 하지만 흉하다.
VS
베이직이 잘 잡혔다. 그런데 심심하다.


최근드는 딜레마가 바로 이거...
흉하게 추긴 싫다.
그렇기 때문에 베이직에 집착하는데...
베이직에 집착하면 재미가 없어진다.
일단 음악을 들을수가 없다.


모든 정신이 허리를 곧게 폈는가?
가슴은 내밀었는가?
목은 꼿꼿한가?
배는 집어 넣는가?
팔에 힘은 풀었는가?
텐션의 강도는?
스트레치는 제대로 서서히 어깨근육을 써서 늘렸는가?
프레임의 위치는?
팔뤄에게 모멘텀을 제대로 줬는가?
트리플시 제대로된 리듬감으로 밟았는가?
바운스는 상하 골고루 분산되었는가?

사실 신경 안써도 추는데 무리는 없다.
하지만 동영상에 찍힌 내모습을 보니 너무 흉하다.
어정쩡한 무게중심과 불규칙 바운스...
주저앉은듯한 스윙아웃.
다리는 가볍게... 상체는 무겁게... 해야 하는데...
이 모든걸 거꾸로 한다.
다리는 무거워서 질질 끌리고... 상체는 경운기 올라탄 마냥 덜덜덜 떨린다.


베이직에 집중하면 음악도 잘 안들리지만 팔뤄도 잘 안보인다.
사면초가 상황.
게다가 주변 상황을 인지 못하니 부딪히기 일수다.


베이직에 집중하면 느낌 좋게 출순 있지만... 팔뤄들이 심심해 한다.
음악에 집중하며 즐기면 팔뤄들이 즐거워 하지만... 내 모습이 흉하다.

정답은 어디일까?
Posted by loki (archflow@hotmail.com)






고도의 마케팅 전략으로 책 팔아치우는데 성공한 더 로드...
이곳에서의 전략적 홍보 정책 타이틀은 "감히 성서에 비결될..." 으로 시작하는 문구이겠다.

물론 이런 부분이 묵시록적인 내용과 적절하게 잘 맞아 떨어지는듯 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과연 얼마나 팔렸을까 싶다. 물론 이런식의 과대 포장, 판매 전략은 항시 사람들을 잘 속이고 대량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개인적으로 핵전쟁 이후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화장실에서 휴지대용으로 쓰기도 아까운 책 리스트에 들어갈법한 내용.


이야기의 분위기나 묘사등은 적절해 보이지만 몇가지 상상력의 제한이 걸려 맞지 않는 모습에 다소 많이 불편했다.


첫번째가 카트를 모는 모습이다.
전형적인 홈리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이 모습이 먼 미래의 재앙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듯 일견 사실적인 모습처럼 보인다. 추위과 굶주림 그러면서도 자신의 것을 지키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모습. 하지만 간과하고 넘어가는 소재중 하나가 바로 재앙이다.
그것이 핵이건, 중성자탄인건, 소행성 충돌이건 나무가 죽고 땅이 갈라진 환경에 사방에는 재(핵먼지 비슷한..)가 깔려있는 환경이다. 이런 환경속에 장거리 여행을 떠나며 카트를 끌고 다니는 설정.

실제로 장거리 여행을 걸어가며 카트를 끓고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짐없이 시속 4키로 도보라면 40km가는데 10시간이 소요된다. 그런데 카트를 끌고 짐을 들고 이동하며 아이와 도로를 여행한다. 차라리 자전거가 더 낫지 않을까? 부셔진 차도 있고, 카트도 있을 정도면 대충 찌그러진 자전거쯤은 충분히 있을듯 하다.

게다가 자전거에 비하면 마트에서 쓰이는 카트는 그리 내구도도 좋지 않고 둔덕이나 얕은 계단을 오르기 쉽지도 않다. 한마디로 도로 전용이란 소리이다. 단지 카트를 끌고 다니는것은 얄팍하게 도시 부랑자 모습을 보여주어 재앙이후에는 부랑자처럼 살아야 한다고 여기게끔 착각하게 하는 행위 그 이상도 아니다. 설마 카트나 손수레등은 멀쩡하지만 자전거는 모두 부셔진 재앙은 아니겠지?

더불어 도로에 자주 나타나는 식인무리들은 종종 차를 몰고 다니는데, 이런 위협적인 길을 카트를 끌며 반드시 가야 할까? 그것도 먹을것도 별루 없이? 이럴수록 더더욱 산길을 돌아 이동해야 하지 않을까? 도로는 이미 위협에 노출된 상황이니 만큼 도로를 피해서 가는게 맞을것이다. 물론 소설 제목은 바뀌어야 겠다. 더 마운틴으로... ;;





두번째로 불편한것이 식인화에 대한 부분이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로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얼라이브의 내용처럼 안데스산맥에 불시착후 고립되어 죽은 시체를 먹으며 연명했던 이야기라던가 에식스호의 비극처럼 배가 조난당한뒤 보트에서 제비뽑기로 한명씩 희생하는 이야기들.

하지만 이런 실제사례를 찬찬히 뜯어보면 굶어 죽더라도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사람과 인육에 맛들린 사람으로 양분되고 공격적 성향의 식인종화 되어가게 되면 이는 식량 자체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사냥감을 쫓는 행위에 더 근접해진다.

하지만 그리 멀리 보지 않더라도 현시대를 살아가는 오지의 사람 혹은 난민들을 보더라도 일주일 굶는건 기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식인으로 돌변하진 않는다. 통조림이나 패스트푸드가 없다고 사람을 공격하는 행위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건 왜일까?

두 부자는 먹을것이 없으면서도 악착같이 생존하는데 반해서 식인 무리들은 뛰어다니며 사냥하는것에서 왜곡된 면이 보인다. 사람을 사냥감처럼 사냥하고 지하실에 가두는 무리들.

과연 그들이 굶주림때문에 식인습관을 가졌을까? 90대 노인도 생존한 상황에서 그렇게 굶주림에 허득일까? 이들은 다른 부류의 인간. 아니 종족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렇게 활달하게 뛰어다닐 정도라면 그 반대적인 세력도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영화속의 이들의 무리는 생존을 위해서 사람들이 식인화 되었다기 보다는 새로운 종족들이 세상을 지배하는듯한 인상을 준다. 마치 사이코패스 집단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주변에 먹을 작물은 고사하고 아예 생물조차 없는데 오히려 자신들끼리 먼저 잡아먹는 생활을 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식인화가 되었다면 신선하 고기를 찾는쪽으로 변질되어 버릴게 아니던가?




세번째로 드는 불편함은 아이의 행동패턴이다.
아이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만나야 한다고 되지도 않을 땡깡을 부린다. 영화속에선 개에게 음식 나눠주려 하는 모습을 매우 세심하게 묘사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아이의 순수함을 강조하려 했는진 모르겠지만 당장 먹을게 없어 배고파 뒤질 상황에 이런 교과서적인 이야기가 나오는것도 의문이다.

무조건 살인은 안된다며 말리는 아이. 노인을 돕자고 이야기 하는 아이. 그러면서 자신을 지켜주고 아빠에겐 대들고 소리지른다. 무언가 상황이 현실을 빗댄듯 한 이 설정은 묘하게 위화감을 준다.

작가가 더 넓은 세상의 못사는 아이들을 한번이라도 봤다면 과연 그런 묘사가 나올까 싶다. 한번도 제대로 배불리 먹어보지 않은 아이들의 마음을 과연 작가가 알 수 나 있을가 싶은 모습들. 생존에 대한 위기감이나 낯선 모습보다는 한없이 사랑스럽고 지켜야만 하는 존재로서 그려진 아이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아이들은 빨리 적응한다. 세상이 어떻든 아이들은 살아간다. 그동안 살아온 세계와 다르면 어른들은 적응하기 힘들어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보다 유연하게 적응한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나이만큼 그 세계가 딱딱해지기 때문이고 그런만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는 지금 살아가는 세상이 현실이기에 받아들이는데에 부담이 없다. 소설속, 영화속 아이는 어제까지 사립학교를 다니던 아이처럼 행동한다. 또래 친구와 어울리지 못한 아이가 낯선 아이를 발견했다고 해서 쉽게 만나려 할것인가? 아니면 적대시 하고 두려워 할것인가? 노인을 돕기 위해 자신의 먹을 것을 쉽게 내줄것인가? 아니면 버려두고 갈것인가?

아이를 보는 관점이 마치 할아버지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랑스런 손자를 보는듯이 묘사되어 있어서 매우 불편하다. 재앙이후 탄생한 아이가 세상에 적응해서 살아간다면 몇살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재빠르게 적응하던가 아니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것이다.



음울한 분위기나 생존을 위한 투쟁등은 볼거리가 있었지만 나머지 묘사들이 재앙이후 채 일주일 지나지 않은듯한 이미지여서 서로 제대로 섞이지 않은 칵테일처럼 먹고 나며 머리가 지끈거리듯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이는 비슷한 부류로 놓을수 있는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과 견주어 본다면 이 소설이 얼마나 대충 쓰였는가를 알수 있을것이다.


ps. 자신의 늦둥이 아이를 위해서 썼다고 하는데 무슨 사랑과 애정인지 도대체 분간할수 없다. 단지 길거리에 지나가는 부랑자(홈리스)를 보고 썼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내용들.

Posted by loki (archflow@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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